한국의 성인들

124위 복자들


작성자 Admin(admin) 시간 2014-12-02 16:4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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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자 홍익만

▲ 복자 홍필주



‘혜경궁 홍씨’하면, 우리나라 사람은 모르는 이가 별로 없을 것이다. 사도세자의 빈이자 정조의 생모인 데다 회고록 「한중록」의 지은이로 잘 알려져 있어서다. 

왕가의 비극을 끌어안은 채 한 생애를 살아야 했던 이 여인은 정조 집권기인 1795년 회갑을 맞던 해에 「한중록」 제1편을 쓰고, 자신의 동생 홍낙임이 천주교 신자라는 이유로 제주로 유배됐다가 사약을 받고 죽으면서 제주의 첫 순교자가 되자 그 슬픔을 잊고자 「한중록」 제2∼4편을 쓴다. 

혜경궁 홍씨의 친정이 풍산 홍씨 모당공파로, 지난 8월에 시복된 이만 해도 홍낙민(루카)ㆍ홍재영(프로타시오) 부자와 홍재영의 며느리 심조이(바르바라), 같은 집안인 홍필주(필립보)와 서모 강완숙(골룸바) 등 5위에 이른다. 이 집안이 이렇게 복자를 많이 내게 된 배경은 ‘한국의 첫 수덕자’로 꼽히는 농은 홍유한이 집안을 가톨릭 신앙의 길로 이끈 데 있다. 이 가운데 홍필주는 이현(안토니오)과 함께 남양 홍씨인 홍익만(안토니오)의 사위로 들어가 신앙의 길을 걸었고 지난 8월에 시복의 영예를 안았다. 홍익만, 홍필주 두 복자에 대해 알아보자.

우선 양근 출신인 홍익만은 한국교회 설립 직후인 1785년께 천주교 교리를 듣고 김범우(토마스)를 찾아가 교회 서적을 빌려 읽고 이승훈(베드로)에게서 세례를 받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 이후 그는 교회 지도층 신자들과 교리를 연구하며 신앙생활을 하긴 했지만, 주변 환경 탓에 교회 가르침에 따라 제사를 폐지하지는 못했다. 그렇지만 1796년 사위 홍필주의 집에서 주문모(야고보) 신부에게 성사를 받고, 가까운 신자들과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교회 일을 도왔다. 당시 그의 집은 주 신부가 설립한 평신도 단체인 명도회의 하부 조직인 6회 가운데 한 곳으로 선정돼 있어 교리 연구 및 전교에 거점이 되기도 했다. 그랬기에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면서 지도층 인물로 수배돼 안산과 여주 등지로 피신을 다니던 중 포졸들에게 체포돼 포도청과 형조에서 혹독한 문초와 형벌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그는 이미 체포된 교우들 외에는 아무도 밀고하지 않았고, 마침내는 1802년 1월 29일 서울 서소문 밖 형장에서 손경윤(제르바시오) 등 동료 복자 3위와 함께 끌려나가 참수형을 받고 순교한다. 

복자 강완숙의 의붓아들 홍필주는 충청도 덕산의 양반 출신으로,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에게서 교리를 배워 입교한 뒤 먼저 신앙을 받아들인 계모 강완숙의 덕행을 모범으로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부친이 천주교를 싫어해 온전히 교리를 실천하는 데 어려움을 겪자 1791년 신해박해 이후 강완숙과 함께 상경해 열심히 교회 일에 참여했다. 그가 풍산 홍씨였기에 혜경궁 홍씨와 인연이 닿았고 강완숙도 폐궁에 살던 정조의 이복동생 은언군 이인(1775∼1801)의 부인 송 마리아와 역적으로 몰려 죽은 아들 이담의 부인 신 마리아(?∼1801) 고부에게 드나들며 전교하고 세례까지 받도록 이끈다. 이같은 활동으로 그의 이름은 강완숙과 더불어 교회 안에 크게 알려졌고 신유박해 당시 일찍부터 체포 대상자 명단에 올라 체포됐으며 포도청과 형조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았다. 홍필주는 특히 주 신부의 행방을 알아내려는 박해자들의 목적 탓에 다른 이들보다 혹독한 문초를 받아야 했지만 마음을 다잡아 굳게 신앙을 증거했고 1801년 10월 4일 서소문 밖으로 끌려나가 참수됐다. 

‘장인과 사위’라는 인척 관계로 얽혔지만 두 순교 복자는 하느님의 사람으로서 부족함이 없었다. 해가 나든 눈비가 오든, 평탄하든 역경이 오든 항구하게 신앙의 길을 걸어갔고, 그 혹독한 옥중 생활도 오롯이 천주만 의지한 채 순교의 길도 걸었다. 고통 속에서도 은총을 찾는 믿음의 길이란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는 신앙 선조가 바로 홍익만과 홍필주 순교 복자다. 

오세택 기자(평화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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