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찍이 천주교와 신학문으로 개화한 집안에서 자란 방유룡 신부는 30세에 사제 서품을 받았다.
방유룡 신부는 신학교 시절부터 수도 생활을 원했고,
완덕에 이르러 성인이 되고자하는 원의를 지니고 있었으므로 특별히 수도원 지망에 관심을두었다.
그는 신학교 시절 이미 한국에진출한 외국수도원들을 방문하였으나
자신의 소명은 외국수도회 입회가 아니라 한국적인 수도회를 설립하는 것이라는 깨달음을 얻게되었다.
이는 당시 일제 지배하에 있던 한민족의 암울한 시대상과 근대화로 유입된 서양학문과
가톨릭교회의 수도생활, 외국인선교사들의 모습을 보면서 민족의 구원에 염두를 둔 한국인 사제로서
한국적인 구도의 길을 개척하는것이 더욱 마땅하리라는 깨달음이었다.
방유룡신부는 한국적인 수도 생활의 맥은 당연히 한국천주교회의 창립자들이며 신앙의 선조들이었던
한국의 순교자들의 얼을 이어가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1946년 4월 21일에 윤병현·홍은순 수녀와 함께 새로 설립하는 수녀회의 이름을 한국순교복자수녀회라고 정했다.
이어서 1953년에는 남자회원들을 위한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를 창립함으로써
한국적인 영성으로 살아가는 남녀수도회를 설립하겠다던 자신의 뜻을 이루었다.
1962년 10월에는 미망인들로 시작된 수도 공동체인 빨마회의 설립을 윤병현·홍은순 수녀에게 허락함으로써
명실상부한 한국순교복자수도회 대가족의 창립자가 되었다.
1957년 자신이 창설한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에서 종신서원을 하였고 수도 사제로 소속을 바꾸었다.
그 뒤 한평생을 영적 수덕 생활에 몰입하면서 남녀 수도 회원들과 일반 신자들의 영적 지도에 전념하다가
1986년 1월 24 선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