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성인들

124위 복자들


작성자 Admin(admin) 시간 2014-12-02 16:4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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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25㎞가량 떨어진 남한산성은 유사시 임시 수도 역할을 한 군사 요충지였다. 1637년 1월 30일 인조가 남한산성을 나와 삼전도(현 서울 송파구 삼전로 삼밭나루)에서 청 태종에 무릎을 꿇고 항복한 곳으로 유명하지만, 중국식 성제와 서구 화기 도입에 따른 축성 기술의 변화를 반영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지난 7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남한산성은 교회사에도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남한산성이 교회사의 전면에 등장하는 건 한덕운(토마스, 1752∼1802) 복자부터다. 경기도 광주부 의일리(현 의왕시 학의동)에 살던 한덕운이 남한산성에서 처음으로 순교하면서 교회사에서 신앙 사적지가 됐다. 

이에 앞서 1791년 신해박해 때부터 신자들이 남한산성에 투옥됐다는 전승이 내려오고 있지만, 정확하지는 않다. 이후 1839년 기해박해 때는 새로운 교우촌으로 성장한 구산(현 경기도 하남시 미사강변북로)에서 김만집과 김문집, 김주집 등이 체포됐다는 기록이 남아 있고, 1866년 병인박해 때는 구산교우촌 김성희와 김차의, 김경희 등 40여 명이 체포돼 갖은 문초와 형을 받다가 순교한 터전이 된다. 

충청도 홍주 출신인 한덕운 복자가 경기도 광주로 이주한 건 1800년 10월의 일이다. 그 이전인 1790년 10월 윤지충(바오로)에게서 교리를 배워 입교한 그는 이듬해 윤지충이 신해박해로 체포돼 순교했음에도 비밀리에 더욱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며 신앙생활을 해나갔다. 그러던 중 1794년 말 주문모(야고보) 신부가 입국하자 성사의 은총을 받으려는 열심으로 주 신부를 만나려 했지만, 끝내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렇지만 경기도 광주에 정착한 뒤로 그는 기도와 독서에 몰두하면서 하느님 뜻이 무엇인지 늘 살피고 성찰하며 그 뜻을 따르는 데만 전념했다. 그는 특히 신자들을 모아놓고 가르치고 권면하기를 좋아했는데, 이럴 때면 그의 말은 언제나 그의 마음과 마찬가지로 굳고 날카로웠다고 한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한덕운은 옹기 장사꾼으로 변장한 뒤 한양에 올라간다. 교우들의 소식이 궁금하기 이를 데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한양 청파동에 이르른 그는 거적에 덮인 홍낙민(바오로)의 시신을 보게 된다. 놀라고 비통한 마음으로 시신에 애도와 함께 슬픔을 보인 그는 그의 아들(홍재영 프로타시오)을 보고는 부친을 따라 함께 순교하지 못한 것을 엄하게 질책한다. 이 질책을 들은 홍재영은 훗날 신앙을 되찾아 1839년에 순교하게 된다. 서소문 밖에 다다른 그는 최필제(베드로)의 시신을 찾아 장례를 치러주기도 했다. 

피로 얼룩진 박해 상황에서 신자들의 시신을 돌봐준다는 것은 자신이 신자라는 사실을 공공연히 드러내는 위험천만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결국 그는 포졸들에게 체포돼 포도청으로 끌려갔고, 여러차례 혹독한 문초와 형벌을 받았다. 그럼에도 그는 다른 신자들을 밀고하지 않았으며, 어떤 형벌에도 굴하지 않고 굳건하게 신앙을 증거했다. 그런 다음 동료들과 함께 사형 판결을 받고, 자신의 거주지이던 남한산성으로 옮겨져 참수형을 받았다. 1802년 1월 30일로, 그의 나이 만 50세 되던 해였다.

그 순교터는 어디일까. 교회사학자들은 현재 남한산성 동문 밖 주차장 한쪽 ‘남한산성 옛길’이라 적힌 돌비석 근처가 한덕운의 순교터로 추정하고 있다. 남한산성 동문은 18∼19세기 당시 서울에서 충주까지 이어지는 송파장과 광주장, 경안장 등 장이 섰던 곳으로, 유동 인구가 많아 사형을 집행하기 좋은 곳이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한덕운을 시작으로 기해ㆍ병인박해를 거치며 남한산성에서 피를 흘린 순교자만 300여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되지만, 안타깝게도 그 행적과 성명을 알 수 있는 순교자들의 수는 극히 적다. 이에 그 순교 터를 기려 수원교구에선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남한산성로 763-58에 남한산성 성지를 조성하고 순교 신심을 새기는 터전으로 삼고 있다.

끔찍한 고문을 받으면서도 믿을 수 없을 만큼 의연했고, 침착했으며, 강렬하면서도 힘차게, 또 마음을 꿰뚫는 언변으로 신앙을 변론했던 인물, 또 신분도, 삶의 여정도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일상에서 충실하게 주님의 포도밭을 일구며 성화를 이뤄낸 복자, 그가 바로 한덕운이었다.

오세택 기자(평화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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